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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8-1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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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敬順王) 손국(遜國)협상 방법과 과정 결과에 대한 설화 전설 지역별 연구

기사입력 2022-03-0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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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국(遜國) : 자기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나라를 통치력 있는 사람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일.

 

보 학 연 구 자 료

김녕김씨 충의공파 입향조 겁암 김영년

원생문중 25세손 김동현

교정 감수 합천 향토사 이성동

2019326~ 2021102

본 글은 2019년 연천문화 23호에 등재 신라(新羅)경순왕(敬順王) 설화 전설에 대한 지역별 연구라는 제목으로 이미 발행되어 전국 문화원과 경순왕을 중시조로 모시는 일부 종친회에 전달된 글로써 발행 당시 전설의 내용 중에는 경주 전설 부분과 관련한 객관적인 문헌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해석과 고증을 할 수 없었던 부분이 많았는데, 경주 전설과 유래에 관한 근거 자료를 다큐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정사(正史) 기록 중에서 추가로 발굴하여 글의 주석 내용을 보강하게 되어 발행 당시 p36정도 (연천문화 23

)분량의 글이 p52 정도로 글의 분량이 늘어나게 되어 여기에 기록을 남기며 내용 중 월광태자(도설지)에 관한 삼국통일 전쟁에 참여하였다고기록 하였으나 이는 잘못 기록된 사실을 알려드리며 김유신 장군과 같은 시대가 아닌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선 김유신 장군의 조부 김무력 장군과 같은 진흥왕 시대 영토 확장전쟁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나주김씨 김근학 선생의 고증으로 내용을 정정 수정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본 글은 설화 전설이기는 하나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경순왕 손국 협상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순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므로 제목을 새로이 바꾸었고 경순왕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경주전설(유래)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을 널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무열대왕, 흥무대왕(김유신 장군), 경순왕의 연고가 있는 타 지역 문화원에서도 추가 등제 발행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목 차

 

1. 연구 목적

2. 연구 방법

3. 연구 방향

4. 울산 전설 설화.

5. 경주 전설

(1) 경주지역 전설 유래 원문

(2) 경주지역 전설 유래 원문 해석

6. 파주 전설

(1) 도라산 전설

7. 연천 기록

8. 연구 결론

9. 참고문헌

10. 경주 경순왕 전설 고증

11. 자문위원

12. 전문위원

 

1. 연구 목적

전국의 여러 지역에 전해오는 수많은 경순왕(敬順王)과 관련한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 설화 전설 중 경순왕(敬順王)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설화 전설 발굴을 목적으로 연구하였다.

2. 연구 방법

전국에 알려진 경순왕(敬順王)이야기를 도별로 지역별로 각 도지, 군지, 면지를 국립 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수집하여 지역별로 정리하였고 이중 경순왕(敬順王)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한 전설과 이후 살아서 생전의 자료 선별 정리하여 별도로 연구해 총 4건의 자료를 확인하였다. 또한 경주전설에 관한 내용의 객관적인 근거기록을 찾기 위해 정사()기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KBS 역사스페셜, KBS 한국사 전, KBS 역사 추적 및 다큐 프로그램 등을 참고하여 역사 연구 학자(전문가)들의 방송내용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경주 전설 해석내용을 고증하였고 주석란에 고증 내용 및 연구자의 이름과 프로그램명을 표기하였고 출처 표시와 관련하여 인터넷 주소 접속일자는 일괄적으로 참고문헌에 별도 표기하였고 참고인용 하였다.

 

3. 연구 방향

신라 56대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은 신라를 고려에 손국(遜國)한 임금으로 정사(正史)에는 역사적 기록으로 연구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경기도 연천의 경순왕릉(敬順王陵)이 역사적 지역적 연고가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야사(野史)에 관한 이야기는 지역적으로 설화나 전설 등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취미로 전설을 연구하다가 역사적 유물을 발견하여 정사(正史)가 된 경우도 있다. 특히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전설, 설화 등 기록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임금님 사당 중 전국에 사당이 존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인 자료 조사를 하던 중 전국에 7개 지역에 사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는 곳도 세 곳 정도 있다.

예상하지도 못한 지역에서 무속이나 동제 사당과 기록이 존재하고 지역에서의 향토 사학자들과의 교류가 이어지게 되었다.

 

자료를 수집하던 중 경순왕 가족들에 관한 기록도 지역마다 여러 가지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신라 경순왕과 관련한 전국에 산재해 있는 기록 중 순수 경순왕(敬順王)과 관련한 설화 전설 발굴을 위하여 조사하였고 기록을 서술함에 있어서 지역 유적 중심으로 서술할지 아니면 경순왕의 행로를 중심으로 서술할지를 고민하다가 몇 가지 기준을 세워 우선 경순왕이 신라를 손국하기 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울산전설과 경주전설을 먼저 기술하고 손국하고 난 이후의 경순왕(敬順王)의 파주 도라산 전설과 생을 마감한 이후의 경기도 연천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고, 경순왕 사후 경순왕의 사당 유적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 곳과 무속의 성황신이 된 부분과 왕비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는 기록은 별도의 글에 지역 순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야사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설화, 전설을 정의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글 앞머리에 먼저 서술하기로 하고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울산 대학교 박경신 교수의 글 중 설화나 전설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다음 글을 인용하였다. (울산시가 2002에서 인용)

 

전설은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구현하는 이야기이다.

전설은 그 발생 목적에 따라 설명적 전설, 역사적 전설, 신앙적

전설로 분류된다.

특정 지역의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했거나 특정지역의 어떤 것이

나 어떤 사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설명적 전설이다.”

 

경순왕과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본 글의 시작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중심으로 먼저 서술하도록 한다.

경순왕은 문성왕의 6대 손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경순왕릉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朝鮮) 영조(英祖)때에 다시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 중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경순왕은 왕이 되고 싶어서 된 왕이 아니다. 견훤이 침공했고 경애왕이 시해 되고, 본인의 의지와는 관련 없이 왕이 되어 나라의 마무리를 하게 된 비운의 왕으로 야사인 전설이나 설화 속에서 이제 그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경순왕은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국력이 쇠퇴 하고 난 뒤의 국가운영은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당시의 외교적 해법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에서 많은 고민을 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라를 고려에 양위하기 전과 후의 전설로 구분하면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 당시에는 불교가 국교였던 시기이고, 그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온다.

울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국운이 다해서 당시 국교가 불교였던 신라를 고려에 양위하기 전 마지막 희망으로 불력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울산 전설이 있는데, 경남 울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순왕 설화와 한 가지 전설이 전한다.

 

4. 울산 전설 설화. (울산시사 2002에서 인용)

울산 설화 1.

신라 경순왕이 문수보살을 만난 일을 전하는 두 개의 설화 역시 울산 영취산의 문수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경순왕이 직접 공양을 베푸는 자리에 초라한 행색의 비구가 참석했다가 가려고 하자, 경순왕이 말하기를 국왕에게 친히 공양 받았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자 비구는 폐하께서도 진신(眞身) 문수에게 공양을 올렸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마시오하고는 몸을 날려 남쪽으로 가버렸다.

 

왕이 놀라 뒤를 따라 두동면 은편까지 왔으나 따라가지 못 하였다. 왕이 헛일이구나, 헛일이구나외치며 길을 재촉하여 망성까지 왔으나 문수보살은 몸을 날려 영취산으로 숨어버렸다. 그리하여 은편 고개를 헛고개라 하고 사라져가는 문수보살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망성(望聖)이라 하였다고 한다.”

 

울산 설화 2.

경순왕이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취산 문수대성의 계시를 받아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태자와 둘째 왕자를 데리고 하곡현의 영취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먼저 태화사에 참배하고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 한 동자승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습니다.” 하였다. 왕은 다행이라 여기고 만족해하면서 따라갔다. 그러나 삼호 앞에서 태화강을 건너자 얼마 안가 동자승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경순왕은 이 동자승이 바로 문수보살임을 직감하고 하늘이 이미 나를 저버렸구나 하며 크게 탄식 하고는, “이제는 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왕은 발길을 돌려 경주로 환궁하여 고려 태조에게 손국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이 탄식한 자리를 헐수정이라 부르게 되었고,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 하였다.”

 

울산 전설 1.

무거동과 문수사의 유래신라의 경순왕이 나라의 제사를 지내면서 꼭 문수보살을 청해서 제사를 주관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하들을 각지로 보내어 문수보살을 찾아 모셔오게 했다. 신하들이 흩어져 각지의 절을 다 뒤졌으나 절에 스님이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울산 지역을 뒤지던 신하들이 통도사를 거쳐 문수산 자락으로 올라가다 보니 산중에 불빛이 비치는 곳이 있어 찾아갔더니, 암자가 하나 있고 거기에 스님 한분이 계셨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스님은 문둥병자였다. 신하들은 모두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 하고는 바로 돌아 나왔다. 신하들은 임금께 가서 스님이 계시는 절이 한 곳도 없고, 오직 한분 찾은 스님은 문둥병자였다는 사실을 전했다. 경순왕은 스님 없이 나라의 제사를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신하들에게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정 몸이 성한 스님이 없으면 그 문둥병자 스님이라도 모셔 오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이 다시 찾아보았으나 다른 스님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절로 가서 문둥병자인 스님에게 서울(경주)로 갈 것을 청했다. 스님은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사양하다가, 신하들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와서 제사를 주관 하게 되었다. 스님은 제사를 지내면서 피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재물들을 일일이 만지니 임금과 신하들은 두려움이 앞섰다.

제사를 마친 스님은 임금님과 신하들에게 그 음식을 음복 할 것을 권했다. 임금님과 신하들은 더럽게 생각해서 그 음식을 먹지 못하고 스님에게 모두 싸 가지고 가라고 했다. 스님이 떠나 갈 때에 임금님은 문둥병자인 스님이 나라의 제사를 맡아 지냈다는 사실을 발설해서, 백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스님을 불러 스님께서 이번 나라의 제사에 참여 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말했다. 문 밖을 나서던 스님이 문득 돌아서서 임금님을 향해서 말하기를 이번에 문수보살을 모셔다 나라의 제사를 지냈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그 스님이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확연히 깨닫고는 스님을 붙들기 위해서 바삐 뒤를 쫓았다. 그러나 잡힐 듯 잡힐듯하면서도 스님을 끝내 따라 잡을 수 가 없었다. 울산까지 따라온 임금님이 사호에 이르러 바라보니 앞서 가던 스님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간 곳이 없이 없어 졌다는 뜻에서 없을무(), 갈 거()” “무거(無去)”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수보살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서 무거(無去)”, 사라진 동자승을 세 번 불렀다고 해서 삼호”,멍하니 바라보았다고 해서망성”, 문수보살을 쫓아가다가 주저앉았다고 해서 허고개(헛고개)”, 경순왕이 동자승을 쫓아가다가 사라져버리자 헐수 (어쩔수)” 없다고 탄식하며 물을 마신 우물을 헐수정”, 울산에는 현재도 지명으로 쓰이는 곳과 유적은 사라지고 지명만 남아 있는 곳도 있고, 여기서 엿볼 수 있는 부분은 경순왕은 나라를 구하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을 했고 불력(佛力)의 힘도 빌려보려는 의도도 다분히 엿 볼 수 있다.

 

결국 국운이 다해 나라를 양위하려는 결정이 났을 때 많은 의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마의태자는 계속해서 나라를 이어 갈 것을 원했고 경순왕은 백성들에게 고통을 더는 줄 수 없다고 했으며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생각 속에서 서로의 갈 길이 달라서 여기서부터 전설로 이어 진다.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 ()기록

왕자가 아뢰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모아 죽음으로써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만 둘 것인데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까?”

 

이후 경순왕의 전설 중 울산이 손국하기 전의 마지막 전설로 알고 있었으나, 포항지역 전설에서 다른 단서를 찾았다.

신라를 고려에 손국하는 방법에 대해서 경순왕이 많은 고민을 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전설이 경주전설이다.

5. 경주 전설

 

경북 포항에 전해지는 형제산의 단맥이라는 형산기원정사 경순왕 전설이 포항 영일군사와 포항시사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사실은 기록이 잘못 전해진 것이며, 포항이 아니라 경주의 전설로 보아야 한다고 경주 형산 기원정사 주지 구암 스님의 고증이 있었으며 고증 내용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대화체 설명 형식으로 정리하였으며 전설이 담고 있는 속뜻을 해석하여 별도의 글로 첨부 하였다.

 

(1) 경주지역 유래 원문

 

경주 형산기원정사(兄山祇園精舍)

무열대왕(武烈大王)과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

목조상(木造像)의 유래와 경순왕(敬順王)과의 관계

 

신라 29대 무열대왕(654~661)은 진지왕(眞智王)의 왕자 용춘(龍春)의 아들 김춘추(金春秋)이고, 왕비는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더불어 선덕(善德), 진덕(眞德) 두 여왕을 보필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만들었고, 첫 진골(眞骨) 출신의 왕()이 되었다.

▲ (김춘추는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이 되었다.)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과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경주시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재위 2(655) 무열대왕은 3녀 지조(知照)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냈으며, 재위 7(660)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 하였다.

무열대왕은 백제(百濟)를 멸망시킨 다음해인 재위 8(661) 6월에 돌아가셨는데, <삼국사기>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라고 하고 <삼국유사>에는 “59세에 돌아가시니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웠다라고 기록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은 경주(慶州) 서악리(西岳里)에 있다라고 하였다. (경주시사 2006 1권에서 인용)

무열왕릉(武烈王陵)은 선도산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데, 지름 36.31m, 높이8.73m이며, 봉분 아래에는 버팀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일부 노출되어 있고, () 앞에 장대석 9매로 꾸며진 상석(床石)이 놓여있다. 왕릉(王陵)의 동남쪽으로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가 있다.(경주시사 2006 3권에서 인용)

▲ (무열왕릉비 머릿돌 중앙 태종무열대왕지비사진제공 강릉김씨 종친회 김진건)
 

신문왕 19(692) 당나라는 무열대왕의 태종(太宗)이란 묘호(廟號)가 당나라의 태종의 것과 같다고 하여 폐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에 대해 신문왕은 무열대왕은 덕이 있으며, 삼한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다라고 하면서 당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동금석원 태종무열왕릉비 머릿돌 중앙에太宗武烈大王之碑기록)

 

태종무열왕릉에는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후에 조선 명종16(1561) 경주부윤 이정(李禎)은 재임 중에 마을사람들이 이 빗()돌을 깨뜨려 사용하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에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전하는 탁본을 참고로 새로운 비석을 세우고자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서찰로 문의 하였더니,

이황은

무열왕비(武烈王碑)의 이야기는 내(이황)가 잘 들었으며 비석을 돌려받아 새로 세우면 좋겠다. 그러나 이미 잘게 부수었다 하니, 내 생각은 옛날 탁본한 비문은 아마도 거듭 새기면 맞지 않을 것이므로 어떻게 하랴. 그러니 별도로 다른 돌로 그 탁본을 새긴다면 좋지 않겠는가.” 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경주시사 2006 3권에서 인용)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1561년까지는 비편이 남아 있었으며, 이정(李禎)의 새로운 비석 제작 계획은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무열왕릉비 토막 2점이 보관되어 있고, 글씨는 단아한 해서체(楷書體)로 되어있다. 사실, 태종무열왕릉비가 파괴된 것은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잃은 사건으로 볼만큼 중요한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는 기록을 근거로 만들어지고 기록이 없으면 유물, 유적으로 연구하고 가설을 세우고 이를 고증하고 증명하면 학설이 정설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이는 역사 뿌리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사건인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이외에도 경북 포항에 전해지는 형제산의 단맥이라는 형산 기원정사 경순왕 전설이 포항 <영일군사>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 또한 잘못 전해진 것이며, 경주 형산 기원정사 주지 구암스님의 고증에 따르면, 사찰 안에 모셔진 목조상은 경순왕과 김충왕자가 아니라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의 상()이라고 한다.

경주 형산 기원정사 용왕전에 있는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유래집

 

그리고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목조상을 만들어 조성한 인물은 서령(서산)유씨 집안사람들이라고 하며, 목조상 이전에 동()으로 만들어진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동상(銅像)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 동상을 조성한 주인공이 바로 경순왕이라고 한다. 2019년을 기준으로, 20년 전 포항의 한 대학교수가 자료 조사를 하고 간 이후 포항지역의 설화로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이 경순왕과 김충 왕자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구암 스님에 따르면 이 목조상의 주인공은 경순왕과 김충 왕자가 아니며”, 위치 또한 포항지역과 가까이 있어 포항 지역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기원정사가 경주시의 경계선 안쪽에 있는 불교 사찰이므로 경주 지역의 설화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경순왕은 신라 임금 중 재위기간이 제일 짧은 임금으로 나라를 손국하기 전의 전설은 울산지역에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포항지역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이는 포항지역의 전설을 고증하던 중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포항지역의 경순왕 전설이 잘못 기록된 것이고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경순왕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섞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경주 형산 기원정사의 주지 구암 스님의 고증은 다음과 같다.

먼저 형산 기원정사를 설명하자면 우리나라는 사찰이나 절을 말할 때는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도나 태국에서는 불교 사찰을 사원(寺院)’ 또는 정사(精舍)’라고 부르는데, 삼장법사, 팔만대장경을 번역한 구마라습 이라는 큰스님이 인도어인 사원(寺院)’ 또는 정사(精舍)’를 중국어 한자로 번역할 때 ()’자로 사용하기로 했고, 한글로는 라 하였는데, 이는 중국어를 한국말로 번역한 한글 말이다. 내가 고증을 받을 당시보다도 20년 전에 먼저 포항에 있는 어느 대학의 배모 교수라는 사람이 찾아 왔었고 왕장군 용왕전에 모셔진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을 조사해 갔는데 이후부터 포항시 향토지에 잘못된 기록이 올라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형산(兄山)은 경주부로 지역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포항과는 관련이 없는 전설이다. 왕장군 용왕전에 있는 목조상은 경순왕과 김충 왕자가 아니라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다. 내가(구암스님) 형산기원정사에 5살에 출가해 10대 중반까지 어릴 적부터 절에 찾아오시는 신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형산 기원정사를 창건하신 대종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형산 기원정사에 처음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동상(銅像)을 세웠다가 동상을 없애버린 뒤 다시 목조로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을 조성해 모시게 된 연유가 있다. 신라 때는 강이 없고 산이 막혀 있어서, 경주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안강에서 지대가 낮은 신광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삼국통일 이전이나 이후에도 비가 많이 올 때면 큰 홍수가 나고 침수가 되어 신라의 수도인 경주 계림 궁궐 마루까지 침수가 되곤 했다.

삼국통일 후 인구가 50~80만이 살았다고 하는데, 몇 백 년 동안 홍수가 반복되면서 피해가 극심해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왕과 군신들이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렇다 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때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내기를 했고 그 방법은 산을 잘라서 강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라시대가 오늘날과 같은 중장비 기계가 눈부시게 발달한 시기도 아닌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이 매우 어려운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생각해낸 묘책은 다름 아닌 산을 자를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진 용()이 되면 되겠다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용에 관한 전설이나 기록을 보면, 용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유신 장군은 스스로 용이 되기로 한다. 이는 백성을 위해 몸을 헌신하는 희생정신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보시, 보살행이었다. “김유신 장군이 용이 되기로 하고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은 내기를 했다. 김유신 장군이 이 되면 무열대왕의 목을 치고 이 되지 못하면 무열대왕이 김유신 장군의 목을 치는, 지는 사람은 목을 바치기로 하는 내기였다. 장소는 경주에서 물이 흘러가는 곳에 갈대밭이 무성한 습지를 지나 안강이라는 지역에서 기계라는 지역으로 가다보면 신광으로 가는 곳이 있는데 물이 그쪽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은 이곳 습지에서 집체만한 큰 구렁이가 되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이라는 말을 세 번 들어야 용이 될 수 있고, 그러면 내기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김유신 장군은 집 한 채만한 큰 구렁이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갈대숲에 몸을 감추고 머리와 몸 일부만 갈대 숲 밖으로 드러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렁이를 보고 이라고 세 번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데, 신라시대 당시 육지의 물품을 교환하는 죽장이라는 시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갈대숲은 바닷가인 신광 흥해(興海)에서 지역의 마을 사람들이 장을 보러가던 길목에 있고, 죽장 시장을 갈 때면 근처 야산고개를 넘어 갈대숲을 지나가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구렁이를 보자 하는 말이 모두 구렁이라고 했고 이라고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5~6세 정도의 유복자 유금이라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 등에 업혀 지나가고 있었고, 유금이가 자꾸 떼를 쓰고 울면서 투정을 부리자, 그 어머니는 유금이를 달래는 말로 자꾸 울면 너를 구렁이한테 주고 갈 거다라고 말한다. 그때 등에 업힌 유금이가 용인데 왜 구렁이라고 말해요!” 라고 하자 어머니가 구렁이를 보고 구렁이라고 하지 왜 이라고 하냐라고 하면서 그 어머니와 아이의 대화중에 세 번 이상 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김유신 장군은 세 번 이상 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하여 갈대숲에 있던 구렁이(김유신 장군)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면서 용의 꼬리로 힘껏 쳐서 산을 잘라 형산강이 생기니 이때부터 산에 막혀서 고여 있던 물이 물길이 생기면서 형산강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무열대왕이 내기에서 졌기에 약속한 대로 무열대왕은 목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은 처음에는 처남(妻男 ; 김유신 장군), 매제(妹弟 ; 무열대왕) 사이였는데, 김유신 장군이 40대 후반 상처를 하자, 무열대왕은 딸을 김유신 장군에게 주었다.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내기를 하기 전 임금과 신하 관계 이전에 이미 장인과 사위 관계로 변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처남과 매제 사이였지만, 지금은 옹서(翁婿:장인과 사위 관계)관계인데 어떻게 사위가 장인의 목을 치겠냐고 말하면서, 목을 칠 수는 없고 그래도 내가(김유신) 이겼으니장부의 약속이라 표시는 하겠다고 하여 무열대왕의 코 등에 칼로 칼자국(상처)을 냈다고 한다.

전설의 내용대로 무열대왕의 코 등에 칼자국이 있다.

 

 

이 전설이 수 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후대의 경순왕도 이 전설을 알게 되었고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동상(銅像)을 만들어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의 유래는 여기 형산에 모셔진 동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모셔져 있던 동상을 갖다버린 사람은 형산 인근 중명마을에 살던 서령(서산) 유 씨인데, 동상을 갖다버린 이후 서령(서산)유씨 집안 중명 문중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고 멸문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종손이라도 살려야 한다고 몇 백리 밖으로 피난을 갔으나 종손조차도 아파서 위기에서 벗어 날수 없음을 알고 어딘가에 가서 알아보니 그 연유가 형산(兄山)에 모셔 놓은 동상을 갖다 버린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멸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나무로 다듬어서 똑같이 모셔 놓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을 모셔 놓은 지 햇수로 200년쯤 되어요. 최초로 동상을 조성해 모신 사람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고, 신라가 멸망 한 지는 1,100년 되었으니,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의 연원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지요. 그리고 왕장군 용왕전에 있는 무열대왕 목조상에도 코 부분에는 전설의 내용대로 칼자국이(상처) 있어요. 즉 홍수로부터 백성들이 고통을 격지 않고 잘 살게 해주었기 때문에 경순왕이 두 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형산 기원정사 왕장군 용왕전에 경순왕이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조성해 모셨는데, 1천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사이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라는 말은 빠지고 경순왕을 모셨다라고 와전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현재 형산기원정사에는 동상은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이 모셔져 있으며, 이는 동상을 모신지 1,100, 목조상을 모신 지는 200년 정도가 되니,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상이 모셔진 지는 1,300년이 넘는 세월입니다. 절 이름 또한 몇 백 년 전에는 형산에 있는 절이라 하여 형산사라 했고 이후 옥련사라는 이름으로 108년 정도 불리다가 왕룡사원으로 30, 최근에 절 이름을 다시 바꾸어 형산 기원정사라고 불리기 시작한 지 4~5년 정도 됩니다. 라고 8 차례의 고증을 듣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경주 형산기원정사의 주지 구암 스님의 고증 내용이며, 형산 아래 중명마을 서령(서산)유씨 할머니가 구암스님에게 고증해준 내용을 같은 서령(서산)유씨 집안사람들에게서 다음과 같이 추가 고증을 받았다. 중명마을에 거주 했던 구암 스님과 학교 친구인 서령(서산)유씨 유능종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목조상에 관한 이야기의 추가 고증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 포항에 거주 하는 서령(서산)유씨 집안 사암파 (익부공파, 남제공파) 중명문중 20대손"유능종"씨의 고증에 따르면 220~230년 전에 중명마을에 거주했던 유능종씨의 6대조 되는 직계 조상인 조선시대 유상수라는 사람이 당시의 정치적인 이유로 타향으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정착한 곳이 경주 중명마을이었는데, 형산(兄山)의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동상에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 준다는 신비함 때문에 형산(兄山)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매일 중명마을 앞으로 많은 타 지역 사람들이 말을 타고 마을 앞을 지나가는 것이 평소에 마음에도 안 들고 보기 싫어서 동상을 없애 버리면 사람들이 안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집안의 하인 중에 힘이 쌘 하인에게 시켜서 형산(兄山)에 있는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동상을 형산강(兄山江) 수심 깊은 곳에 빠뜨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이 노비라 할지라도 가는 길을 막는 법이 아니어서 마을을 지나가는 타 지역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어서 이러한 일을 한 것 같다고 한다.

이후 서령(서산)유씨 집안사람들이 매일 젊은 나이의 20대가 한 사람씩 계속 죽어가고 집안도 살기가 힘들어져서 종손이라도 살려보려고 종손과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가보았으나 종손마저 이유 없이 아프고 죽을 것 같아 중명문중의 자손이 거의 멸문 지경에 이르게 되어 선비 집안에서는 점이나 운세를 보지 않는 법이나 집안에 위기가 닥쳐서 어딘가에 알아보니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동상을 형산강에 빠뜨려서 이러한 우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아보니 형산 강에 빠뜨린 동상을 다시 건져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조선시대 당시로서는 강의 수심이 깊어서 다시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서령(서산)유씨 집 앞에 있는 큰 버드나무를 잘라서 똑같은 모양으로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목조상(木造像)을 다시 만들어서 형산(兄山)에 모시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우환이 사라졌고, 후손들도 널리 번창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서령(서산)유씨 집안과 중명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현재 형산(兄山)아래 중명마을은 경주시 강동면 국당 1리 중명길로 지명이 바뀌었고, 현재는 중명마을에 서령(서산)유씨 사람들은 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2) 경주지역 유래의 원문 해석

 

경주 형산기원정사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목조상 유래의 은유적 해석

 

위의 전설 내용은 오늘날 화법으로 말하자면 은유법으로 보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어떤 역사적(歷史的) 사실이나 사건 등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돌려서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다 보니 역사적 전설이 되었고, 이를 설명하다 보니 설명적 전설이 되었으며, 경주 형산 기원정사 왕장군 용왕전에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목조상을 모시게 되면서부터 신앙적 전설로까지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예컨대 정치적인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보통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경우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전설 내용 중에 삼국통일 이전이나 이후에도 비가 많이 올 때면 큰 홍수가 나고 침수가 되어 신라의 수도인 경주 계림 궁궐마루까지 침수가 되곤 했고, 몇 백 년 동안 홍수가 반복되면서 피해가 극심했다라는 전설 내용은 신라 건국 당시부터 편안한 시기가 없었고 임금이 거쳐하는 왕궁까지 함락당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실제로 삼국사기 기록에 왜()가 신라에 쳐들어와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저자 선석열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왜()의 실체라는 논문에 도표로 이사금(尼師今)” 시기와 마립간(麻立干)” 시기에 걸쳐서 끊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신라본기> 내용 중에도 왜인(倭人)이 금성(金星)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라는 기록과 궁중의 말이(내구마가) 무릎을 꿇고 슬프게 울었다.”라는 기록을 볼 때 전설 내용과 같이 신라 경주 궁궐마루까지 침수되곤 했다는 말은 즉 왕성이 있는 왕도까지 함락되는 위기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 한전 기록을 근거로 그려본 왜의 영역 그러나 후한서 동이

열전 한전에 나타나는 왜의 영역은 충청도지역을 포함하지 않는 차이가 있다.>

(EBS 교육방송 다큐 잃어버린 역사 한반도의 왜()1,

()는 한반도에 있었다에서인용)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RlhrWJRJUvs&t=1s

(접속일자 2021. 3. 2)

 

이는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의 기록에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당시 국력이 약하여 고구려에 다급히 사신을 보내 구원병 요청을 한 기록 중에 왜인들이 나라에 가득 차서 성과 연못을 부수고 있습니다.”라는 기록과 서기 400년 영락(永樂) 10고구려 태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 했다.(五萬往求新羅 從南居城至新羅城 倭滿基中”)라는 내용과 일치 하는 정황 내용이다.

신라가 고구려의 힘을 빌려 신라에서 왜()의 세력을 몰아내기는 했으나 신라와 가야에 고구려군이 주둔하면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고 극복 해야만 했다.

이후 신라(新羅)가 주변의 많은 가야(伽倻)소국을 병합하면서 가야의 왕과 왕자들이 삼국통일의 대열에 합류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막상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나면 그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고 그러면 자연 권력에서 밀려나는 수순을 밟았을 것으로 보이며, 김유신장군의 누이동생 문희와 무열대왕과의 혼인 또한 이러한 이유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 장군은 정치적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정략결혼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왕실 종친으로서 입지를 갖고 군권(軍權)을 확고히 장악했으리라 본다. 전설에 나오는 큰 산은 신라 앞에 닥친 외교적 지리적 군사적 위기나 위협을 하는 나라의 표현일 것이며, 삼국통일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당시 신라의 영토 규모와 외교적 군사적 지리적 위치가 굉장히 불안한 시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집체만한 구렁이는 신라에서의 막강한 권력자를 나타내며, 구렁이가 소리를 세 번 듣는다는 것은 백제, 고구려, 당과의 세 번의 큰 전쟁에서 세 번을 승리하면 전쟁이 끝난 후 누가 임금이 되는가를 의미 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당(羅唐))연합군인 당나라와도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전쟁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신라의 위기와 위협이었던 주변 강대국 고구려, 백제뿐만 아니라 20세기 미국과 같은 당시의 패권 국가였던 당을 격파하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전쟁에서 세 번 승리했다는 것은 외교적, 정치적, 지정학적, 군사적 승리로 안정권에 들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여 있던 물이 강이 되어 흐르게 되었다는 말은 삼국통일을 이루고 안정화 되었다는 것으로 영토가 넓어져 정치적 외교적, 지정학적 군사적 고립에서 벗어나 멀리 나아간다는 의미와 위기가 사라지고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로 해석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내기 장면인데, 김유신 장군이 이겼기에 무열대왕의 목을 칠 수 있었으나 목은 치지 않았고상징적 의미로 김유신 장군은 무열대왕의 콧등에 칼로 칼자국(상처)을 냈다고하는데 이는 장부의 약속이라 형식만 갖추고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았다. 이는 당시 무열대왕이 임금이지만 군권만은 김유신 장군의 통제하에서 움직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신라시대 당시 군사력으로 금관가야계 김유신 장군이 임금이 되면, 신라 내부의 반발이 심하게 일고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나 오늘날이나 군부(軍部)를 누가 직접 통치하느냐가 정치적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강하기 때문이다. “등에 업힌 어린 아이가 구렁이(김유신 장군)를 보고 이라고 세 번 불렀다고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린아이는 낮은 신분의 일반 백성들을 뜻하고 이때 김유신 장군은 전쟁터에서 세 번이나 대승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으니 이미 모든 신라 백성들의 영웅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김유신 장군을 임금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삼국통일 이후에 김유신 장군이 이라는 말을 듣고, 국민의 영웅이 되었어도, 왕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할 수 있다.

금관가야계이면서 철저하게 ()의 신하(臣下)’로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은 왜 이런 내기를 했는지 궁금하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정치적 군사적 입지에 대해서 암시하는 것으로 무열대왕을 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의 표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가야계와 신라계 왕족의 결혼)

 

신라에 병합된 수많은 가야 소국의 임금과 왕자들이 있었으나, 가야 계통 중에는 유일하게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한 인물이 김유신 장군이며, 김유신 장군의 출생 과정을 보면 아버지는 금관가야계 김서현(金舒玄)이며, 어머니는 신라계(新羅系) 만명(萬明) 이었기에 가능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가야지역 귀족들은 삼국통일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KBS 역사스페셜 대가야(大伽倻)의 마지막 왕자 월광(月光)은 어디로 갔나?”는 대가야 왕자 출신 승려 월광(月光)에 대한 기록인데, 월광태자(도설지)가 신라에 망명하여 진흥왕 시기에 북방 영토 확장전쟁에 참가 하였다가 후일 신라와 대가야의 전쟁에서 대가야가 패전 한 후 대가야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가야의 왕의 자리에 잠시 머물다가 대가야가 신라에 완전히 병합된 이후에 신라로부터 버려진 뒤 승려가 된 월광 스님을 조명하고 있다. 정치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모든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고 마음을 비우고 승려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 여러 시대에서 보면 당쟁에서 지면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가지는 맞서 싸우다가 힘이 다하고 권력에 밀려 죽는(숙청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치권력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는 것이다. 정치, 권력에는 뜻을 두지 않겠다는 모습을 스스로 보이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도 삼국통일 이후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잘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관계)
 

 

그래서 전설 속에 나오는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 문희가 무열대왕의 부인이 되었고, 무열대왕의 셋째 딸 지조가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의 부인이 되는 상황이 이해가 될 것으로 보이며, 다시 한 번 왕(문무왕)의 매제(김유신 장군)가 되었다.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이 그러했듯이 다시 한 번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군신관계로 거듭난 것이다. 왕실의 종친은 되어도, 왕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서로의 의중을 잘 알았고 불협화음 없이 신뢰하고 국가를 운영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신문왕의 전설 중 만파식적내용에도 문무왕과 김유신장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서로 간에 신뢰가 구축된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면 외교(外交)는 무열대왕이 참으로 현명하게 잘 대처했다고 보이며, 내부의 군권 기반은 금관가야계 김유신 장군이 갖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마음만 먹으면 김유신 장군이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내용 중 처음에는 무열대왕과 처남(김유신 장군), 매제(무열대왕) 관계였다가, 후일 장인(무열대왕)과 사위(김유신 장군)관계로 변하면서, 다시 한 번 문무왕과는 매제(김유신 장군)와 처남(문무왕)이 되는 것이다.

(무열왕의 딸 지소를 김유신과 혼인 시키다.)
 

신라시대 당시에는 왕실 근친 족내혼이 엄격한 시기이다. 왕의 영역(자리)을 침범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내기에서 이기고도 장인도 부모인데 사위(김유신)가 장인(무열대왕)의 목을 어떻게 칠 수 있겠냐고 하면서 목을 치지 않았고 다만 김유신 장군은 그래도 내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장부의 약속이라 내기에서 이겼다는 표시는 하겠다고하여 명목적으로 무열대왕의 콧등에 칼로 칼자국만을 표시하고 그 이상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무열대왕의 사위(김유신 장군)와 문무대왕의 매제(김유신 장군)로 만남아 있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의 권위와 자리에 도전하지 않겠다는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처음에는 동()으로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경순왕이 조성하여 모셨으나 1,100년이 흐른 뒤 동상이 있었던 산은 서령(서산)유씨 집안의 종산이 되었고 1,100년 후에는 서령(서산)유씨 집안사람들에 의해 강에 버려졌고, 이후 서령(서산)유씨 집안이 멸문지화의 지경에 이르자 의논 끝에 다시 나무로 조각하여 경주 형산 기원정사 왕장군 용왕전에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 목조상을 조성하여 모신지 200년 정도 지났다고 한다.

전설 내용 중에 신라 초기에 수많은 주변국의 침입으로 궁궐이 함락되고 다급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할 정도로 급박했던 당시 상황이 삼국통일 이후에도 신라 말기 후대에 내린 큰 비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다급히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고려의 구원병을 기다릴 틈도 없이 신라 왕도가 있는 경주에 큰 홍수가 나서 궁궐마루까지 물에 잠기는 위기를 또다시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왕성이 함락되고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유린당하는 상황을 경순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또다시 궁중(내구마)의 말이 무릎을 꿇고 슬피 울어국력이 쇠퇴하여 더는 나라를 보존할 방도가 없음에 경순왕 선대에 있었던 나라의 옛일들을 생각하며 백성들을 구할 방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신라 말기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갈 시기였는데, 과거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될 때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느낀 경순왕이 신라가 고려에 병합 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의 입지가 과거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 왕족과 똑같은 입장에 처한 것이다. 울산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보면, 경순왕이 나라를 구해보려는 노력을 했던 정황들이 보이나,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직감한 듯하다. 경순왕과 왕자와의 대화 중에 신라의 앞날에 대해 고심했던 내용이 전한다.

 

 

왕이 말하기를,

작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장(腦漿)이 땅에 쏟아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시랑 김봉휴에게 편지를 가지고 가서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왕자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에 기대어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신라의 마지막 앞날의 처리 방법에 대해 고심하다가 생각해낸 일이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전설 내용을 생각했을 것이고, 고려에 대한 신라의 손국 처리 방식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 운명의 최종 처리방식으로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신라의 손국을 실행하기 전, 동으로 만든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동상을 조성하여 경주 형산에 모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음의 결정이 끝났다는 의지의 징표로 경순왕은 손국 이후에 더 이상 정치권력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려와 사전 협의를 통하여 손국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이며, 이후 세상에 이야기로 나온 것이 전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가 가야 소국을 정복한 후 그들을 신라인으로 받아들여 평화롭게 공존 했듯이, 신라가 고려에 손국되지 않고 항쟁한다면 강력한 고려의 무력에 의해서 무고한 신라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희생은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안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고심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손국할 당시의 기록이 전한다.

(신라가 고려에 손국하면서 신라왕실과 고려왕실 사이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 김억렴 ; 경순왕 재위시절 합천 대야성 성주)
 

<삼국유사 김부대왕 고려 태조가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다.>의 기록에서 보면,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며 항복해 오니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지금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그 은혜를 받음이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장인과 사위의 의()를 계속하고 싶습니다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伯父)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가 그녀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金氏)이다.

태조 왕건이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과 혼인함으로서 경순왕과 처남 매제관계가 이루어졌고 경순왕이 개경에 가서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함으로서 장인과 사위 관계, 처남 매제 관계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고려 왕실과 신라왕실의 혈연관계가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의 이야기는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사이에 있었던 혼인형식과 똑같은 혼인 형식이 고려와 신라 사이에서도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라는 사라졌으나 금관가야왕실과 백성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한 신라왕실과 백성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810월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다>

고려 태조 1810월 신라왕 김부(경순왕)는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파견하여 입조를 청원했다. 이에 고려 태조는 섭시중 왕철, 시랑 한헌옹을 보내어 영접케 했다. 태조는 동궁 및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가 환영했다.

이때 김부왕(金傅王)을 따라간 서울(동경)의 귀족 관원 서민은 인산인해였고 수레의 행렬이 30리에 뻗쳤다고 한다. 김부는 개경(開京) 유화궁(柳花宮)에 들어갔다. 태조(太祖)는 맏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김부에게 시집보내 처로 삼도록 했다. 그에게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 정승(政丞)을 대배(大拜)하고 식읍 팔천호를 봉하여 지위를 태자의 위에 두었다. 그를 위해 신란궁(神鸞宮)을 창건하고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경주의 지배자로 임명했다. (경순왕)의 딸이 고려 경종(景宗)과 혼인 하여 헌숙왕후(獻肅王后)가 되고 경종 34월 별세했다. 시호를 경순(敬順)이라했다. 이로서,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이양하고 생을 마감했다.

(경순왕은 태조왕건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경종의 장인이 되었다.)

 

<고려사 권57 지 권제11 지리2 경상도 동경유수관 경주 연혁>

고려 태조 18년 신라 경순왕 김부가 항복해 옴에 신라 국호를 없애고 경주라 했다. 경순왕은 이후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위를 양위하고 왕건의 딸과 혼인하여 사위(부마)가 되었으며, 또한 경순왕의 딸이 경종(景宗)의 부인 헌숙(獻肅)왕후가 되어 고려왕의 장인(丈人)이 되었다. 그리고 구렁이(김유신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용()이 된 구렁이(김유신 장군)는 무열대왕을 큰 이변이 없이 그대로 왕으로 인정했다는 점, 고려를 국가로 인정하고 태조 왕건을 왕으로 인정하고 경순왕은 개경으로 가서 태조 왕건의 딸과 혼인하면서, 신라는 사라지고 경주의 사심관이 되었다.(경주시사에서 인용) 또한 지위를 태자 위에 두었다는 것은, 과거 금관가야 김유신 장군과 같은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는 점이고, 그것은 정복자의 지배적 위치가 아닌, 호의적인 관용을 베풀었다는 것은 신라의 평화적 해법을 고려 왕건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고려왕실 혼인으로 태어난 현종) 

 

또한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이 태조 왕건과 혼인하여 왕비(신성왕후 김씨)가 되었고 사심관이 된 후 경순왕은 딸을 고려 경종과 혼인 시켜 평화적으로 나라를 인계함으로써,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이나, 지배자적 위치에서 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입장에서 국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혼인 형식을 빌려서 두 나라가 평화적으로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고 본다.

또한 고려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경종의 장인이 되는 신라 경순왕의 시호와 무덤의 형식을 ()”가 아닌 ()”이라 한 것은 비록 고려의 사심관 형식을 갖추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신라의 마지막 군주로 인정 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신라는 전쟁을 통해서 나라를 잃은 것이 아니라 왕실 혼인을 통한 통일의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본다.

혼인 후 친인척간이 되어 신라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같이 국가를 손국 했고, 불협화음이 없이 서로를 의지했다는 점이 전설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로써 신라가 평화적으로 고려에 인계되었고, 경순왕에 의해서 마지막 신라의 대사(大事)가 마무리되었다. 이는 신라계 무열대왕과 금관가야계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 문희가 정략혼인을 했던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정복자나 패배자 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개념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왕실 결혼 형식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신라가 고려에 큰 변고 없이 통일되는 방식으로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통일 방식은 먼저 신라 경순왕이 오래 전부터 신라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태조 왕건에게 먼저 알리고 이 방식을 채택해줄 것을 먼저 제의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한 평화적인 방식으로 경순왕의 지위를 고려태자의 위이면서도 고려임금의 아래 자리에 두었다는 것은 과거 신라계 무열대왕과 가야계 김유신 장군 그리고 문무왕이 그러했듯이 처음에는 신라와 고려왕실이 장인과 사위(옹서)관계, 고려왕실 태자와는 처남 매제와 같은 가족 관계뿐만 아니라 경순왕의 지위 또한 명목적으로는 고려 임금의 아래 자리에 임명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다는 점이 같다고 하겠다. 이점이 중요한 점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대목은 문화적(文化的) 파괴 없이 신라의 종묘사직과 문물이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점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는 차이가 있으나 전쟁터였으므로 약탈, 방화, 파괴로 많은 문화적 파괴가 일어나고 많은 기록이 사라졌으나, 금관가야와 신라만큼은 이러한 우려 없이 경주의 신라문화가 있는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점은 무엇보다 주목할 만하다. 나라는 사라졌으나 민족은 살아남아 명맥이 이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수 백 년이 지난 후에 경순왕에 의해 동상을 모시게 되면서 유래가 되었고, 또 다시 시간이 1,100년이 흐른 후에 서령(서산)유씨 집안의 종중산이 된 이후 유씨 집안사람들에 의해 동상을 없애 버리고 난 후 유씨 집안이 멸문지화의 지경에 이르러 이를 막을 방법을 찾던 중에 나무로 다시 조각하여 모시게 된 계기가 되었고, 경주 형산 기원정사 왕장군 용왕전에 유적과 전설로 남게 된 연유이며,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 목조상을 다시 조성하면서 수 백 년 전의 전설이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전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몇 가지 의미를 짚어 보면, ‘은 강력한 권력과 임금을 상징한다. 전쟁에 나가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과 전쟁에 지면 책임을 묻겠다는 사실과 전쟁이 끝난 후 처세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열대왕이 김유신 장군에게 물은 선문답(禪問答) 형식의 질문으로 보이는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위의 전설은 무열대왕이 김유신 장군에게 준 두 가지의 화두에 대한 김유신 장군의 대답과 처신에 대한 전설로 보이며, 이 전설대로 태조 왕건과 경순왕이 수 백 년이 흐른 후에 똑같은 방식으로 평화적으로 이룬 역사(歷史)이다.

 

이 전설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고려사 기록을 보면 기록 중에 (태조 왕건)이 의장을 갖추고 교외까지 나와 경순왕을 맞이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후백제와의 전쟁 중에 이웃나라 임금이 찾아오는데 임금의 복식을 갖추고 궁궐이 있는 개경을 벗어나 교외지역까지 마중을 나가는데 왜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알 수 있는 전설이며, 고구려, 백제 멸망의 원인은 내부 분열과 배신에 의한 것이지만,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은 내부 분열이 없었기에 후삼국시대에 다시 이루어낸 삼국통일이라 할 수 있다. 경주 형산기원정사 용왕전에 있는 무열대왕과 김유신 장군의 제사는 매년 음력 33일 불교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6. 파주 전설

파주시사(坡州市史)에는 경순왕과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데 이는 손국 절차를 마치고 태조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혼인하고 난후의 이야기이다.

도라산은 도읍 도()에 신라(新羅)()”자를 사용하고 있고, 도라산에 관한 전설은 본래 장단군이라는 지역 안에 있는 지명이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에 장단군의 일부만 남방 한계선에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북쪽의 미 수복 지역으로 남아있어서 이 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장단군민회에서 장단군지를 1980년 제작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을 장단군의 일부지역이 파주시로 편입되어 오늘에는 파주 시사에 기록 되어진다.

 

(1) 도라산 전설

< 파주시사 도라산에 얽힌 전설 영수암의 유래에서 인용 >

장단읍내 뒤 백학산 서맥내령 맑고 맑은 사천이 흐르는 냇가 벌판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 156m 도라산 고지는 주위 수목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여름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명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라가 경순왕 10(879)에 패망하자 경순왕의 11명의 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이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손국 하였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에게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을 하사 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하여 사심관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도라산(都羅山)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庵)” 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 경종 3(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되자 이와 함께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되기에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였다.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고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라고 기록이 전하나, 오늘날 영수암은 현재 찾을 수 없고 영수암터로 추정되는 곳만 있으며, “창화사는 기록으로만 전하고, 낙랑공주가 영수암을 복구하고 창화사(昌化寺)”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7. 연천 마지막 행적 기록

경기도 연천에는 경순왕릉(敬順王陵)이 모셔져 있는데 왕릉(王陵)을 잃어버렸다가 조선 영조 때 발견되었고 이후 보존되었다. 경기도(京畿道) 연천(連川) 경순왕비문(敬順王碑文)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천군지에서 인용>

(敬順王)은 신라 56대 왕으로 후당(後唐) 천성(天成) 2(927, 고려 태조10) 무자(戊子)에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청태(淸泰) 을미년(935, 태조 18)에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다. () 태평흥국(太平興國) 무인년(978), 즉 고려 경종 344일 훙거(薨去)하니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高麗 景宗)이 장단현(長湍縣) 고부(古府)남쪽 8() 계좌(癸坐)의 언덕에 예로써 장례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성상(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 23년 정묘(1749, 영조23) 월 일 고쳐 세움.”

 

여기까지는 경순왕의 경주(慶州), 울산(蔚山)에 전하는 전설 기록과 손국 후의 전설기록이 파주에 전하고, 연천에는 생을 마감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 경순왕릉의 기록이다. 여기까지는 경순왕이 신라를 손국하기 전의 전설과 신라를 손국 이후의 전설과 행적에 관한 그 과정의 끝이다.

 

8. 연구 결론

사서(史書)의 기록과는 달리 이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야사(野史)이기는 하지만 전설 속에 숨어 있는 속뜻을 해석해가면서 정사(正史)에 가까운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를 증명하고자 객관적인 사서기록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면서 해왔던 작업이어서 볼 수 있는 많은 자료를 활용하여 나름대로 객관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써 사서에서 근거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고 해석 내용에 주석을 붙여 객관적인 설명을 추가할 수 있었다.

수많은 지역에 경순왕과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설화 중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설과 설화는 4건으로 확인 구분되었고, 포항지역의 형제산의 단맥이라는 전설이 이번 경주 형산기원정사 주지 구암 스님과 서령유씨 유능종씨의 고증을 거치면서 무열대왕과 김유신장군의 전설 유래 기록이 경순왕과 김충 왕자로 포항 지역에 잘못 전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교정하여 경주 지역 전설 유래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경주 형산기원정사 전설 유래를 통해서 금관가야가 구형왕대에 신라에 이양되어 김무력, 김서현 및 김유신 장군 대에 이르러 이루어진 신라왕실과의 정략결혼과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를 조사하면서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왜()와 나당(羅唐)전쟁의 성격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20세기 베트남전에 비견될만한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한 것과 같이 나당(羅唐)전쟁 당시에도 패권국가인 초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신라가 힘을 합하여 함께 싸워 승리한 단결력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날에도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읽어 내는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며, 이를 잘못 판단했을 때에 닥쳐오는 파장은 나라의 존망까지도 순식간에 결정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일시적인 내분을 격기는 했지만 극복하고 일심 단결한 결과로서 신라는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김유신장군 사후에 일어났던 김유신장군 후손들의 정치적 죽음과 복권 과정을 통해 수대에 걸쳐서 이루어졌던 화합과 평화적인 금관가야의 국가이양 방식을 천년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가 고려에 이양될 당시에도 금관가야가 신라에 이양되고 나서 경순왕 대에 이르기까지 금관가야가 겪었던 모든 과정들을 감안해서 대가야의 월광태자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라가 고려에 이양된 이후에도 불협화음이 없도록 사전에 모든 점을 감안하여 고려 태조와 임금 대 임금의 자격으로 협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서 경순왕에 의해서 이 모든 과정을 협상을 통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냈다는 사실을 경주 형산기원정사 유래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금관가야는 평화적으로 나라를 이양했기에 6가야 중에 유일하게 삼국사기에 가락국기라는 역사서를 오늘날 남길 수 있었고 가야왕릉 또한 외손자 문무대왕 당시부터 보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 신라 또한 고려에 평화적으로 이양되었기에 신라의 종묘사직과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경순왕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금관가야 김유신 장군이 그러했듯이 경순왕 또한 신라가 건국해서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신라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정리해서 협상을 할 때 이 모든 요소들을 감안하여 경순왕이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오래도록 후손들이 고려 사회 속에서 정치적 입지나 권력에서 대가야의 월광태자나 김유신 장군의 후손 김융과 같은 박해를 받거나 밀려나지 않고 살아남아서 사직(국가)을 오랫동안 보존 할 수 있도록 협상을 통해 나라를 손국(遜國)한 임금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경주 형산기원정사의 유래 전설은 금관가야 구형(구해)왕의 이야기가 그 시작이지만 세상에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경순왕 대()에 이르러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금관가야의 경우와 같이 신라도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국가(사직)보다 백성의 안위(安危)를 우선하였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사서(史書)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에 대해서는 나라를 보존하지 못한 무능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 날 많은 사학자들에 의해서 그것을 해명하는 새로운 사실들이 논문으로 발표되어 경애왕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경순왕의 설화 전설에도 경순왕 사후에 사당유적과 무속신앙의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마을 동제(洞祭 또는 堂祭)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에는 그 풍습이 많이 사라지고 경기도 일부 지역에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지금도 경순왕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마을 동제(당제)를 지내는 곳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경순왕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비록 나라를 잃은 군주(君主)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백성을 구한 성군(聖君)으로 인식되어 망국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는 역사인물로 부각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경주 전설은 신라 손국 협상과 방법에 관한 전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의 용어에 있어서도 나당(羅唐)연합군”, “나당(羅唐)전쟁이라는 용어가 국사책에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신라(新羅)”라는 공식 국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는 국호의 첫 글자를 앞에 넣어 신당(新唐)연합군”, “신당(新唐)전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유튜브 방송 한가람 연구소 이덕일 교수의 방송 내용을 보고 새롭게 알게 된 것으로 역사 용어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이글에서는 기존의 나당(羅唐)”이라는 용어에 익숙해져 있는 분들이 많아서 나당(羅唐)연합군”, “나당(羅唐)전쟁으로 표기하였으나 앞으로는 신당(新唐)”으로 표기될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중요한 점은 삼국통일을 한 신라의 영토의 범위가 오늘날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덕일 교수의 주장(유튜브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고, 삼국통일 당시의 평양의 위치가 만주지역으로 추정한다면 우리나라의 옛 강역(疆域)을 역사상의 기록이라도 다시 찾는 다물정신(多勿精神)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건국이념은 다물(多勿)이었다. ‘다물이란 따물으다’ ‘되물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땅을 되물려 받는다(찾는다)’는 뜻의 고구려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여어위 복구토위 다물(麗語謂 復舊土爲 多勿)”이라고 했다. 이를 풀이하면 다물이란 옛땅을 되찾는다는 고구려 말이다.

 

끝으로 경주 형산기원정사의 유래가 1,300년이나 되었는데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다만 앞으로 본문을 시작으로 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신라말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경주 형산기원정사의 유래>에 접근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권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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