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9-20 11:00

  • 박스기사 > 연재-이서빈 시인

청람 김왕식의 소백산맥 깊이 읽기1

기사입력 2026-09-16 11:43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0

연재를 시작하며


산맥은 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서빈 대하소설 소백산맥17권을 읽다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산맥을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만 보인다.
가까이 가면 달라진다.

바위와 흙 사이에 사람이 있다.
굶은 아이가 있고, 남편을 먼저 보낸 여인이 있고, 총성을 피해 산허리를 붙잡고 달아난 가족이 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채 한 생을 부엌과 밭고랑에 바친 어머니가 있고, 나라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라가 갈라진 대가를 온몸으로 치른 백성이 있다.

산맥은 그렇게 높아진다.

흙이 쌓여 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견딘 사람들의 등이 겹쳐 산맥이 된다.

이서빈의 대하소설 소백산맥17권을 170회에 걸쳐 읽으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을 단지 방대한 역사소설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작품의 절반을 잃는다. 소백산맥에는 국가의 역사가 있지만 그 역사보다 먼저 한 사람의 끼니가 있다. 정치가 있지만 정치보다 먼저 아이를 먹여야 하는 어머니의 손이 있다. 전쟁이 있지만 포성보다 먼저 가족을 잃은 사람의 빈방이 있다.

역사책은 왕과 장군, 대통령과 전쟁의 날짜를 기록한다. 소설은 그 날짜 밑에서 밥을 짓던 사람을 찾아낸다.
이 차이가 문학이다.

소백산맥의 첫 권에 등장하는 달녀를 보라.

그녀는 역사적 영웅이 아니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사람도 아니다. 역사 교과서 어느 쪽에도 이름이 실릴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대하소설의 중요한 문이 열린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사람을 문학이 기록한다.

달녀에게 하루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였고, 자식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였으며, 내일 아침 다시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한 그릇의 밥이 정치보다 급했던 사람들.

소백산맥은 그들의 등을 밟고 한국 근현대사의 능선을 오른다.

170회 연재는 작품을 칭찬하기 위한 장문의 헌사가 아니다.

좋은 비평은 작품 앞에서 향을 피우는 일이 아니다. 작품이 가장 빛나는 자리와 가장 흔들리는 자리를 같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서빈 소설의 시적 문장이 어디에서 놀라운 힘을 얻는지 살펴볼 것이다. 방언이 어떻게 지역의 언어를 넘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문이 되는지도 볼 것이다. 제주 4·3과 한국전쟁, 분단과 산업화가 소설 속에서 어떤 얼굴을 얻는지 따라갈 것이다.

동시에 살필 것도 있다.

시적 문장이 장편서사의 속도를 늦추는 순간은 없는가. 역사자료가 소설 속에서 지나치게 앞에 나서는 지점은 없는가. 비극의 축적이 어느 순간 독자의 감각을 무디게 하지는 않는가. 특정 역사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문학적 거리를 좁히지는 않는가.

이러한 질문은 작품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큰 작품일수록 큰 질문을 견뎌야 한다.

쇠를 불 속에 넣지 않고 명검을 말할 수 없듯, 작품 역시 비평의 불을 통과할 때 자신의 강도를 드러낸다.

소백산맥에는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영주다.

영주는 이 작품에서 주소가 아니다.

소백산, 순흥, 부석사, 들판, 장터, 골짜기, 사투리, 오래된 풍속이 서사의 살과 피가 된다. 인물이 떠나도 땅은 남고, 시대가 바뀌어도 산은 같은 자리에서 사람의 흥망을 지켜본다.

세계문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장 세계적인 작품이 반드시 가장 넓은 장소에서 출발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자기 땅을 깊이 파고들 때 세계와 만난다.

고향의 우물 하나를 끝까지 들여다본 작가에게 그 우물은 마침내 인간 전체의 심연이 된다.

영주가 한국문학의 변방인가.

문학에는 변방이 없다.

사람의 슬픔이 있는 곳이 중심이고, 인간의 생이 끝까지 밀려 있는 곳이 문학의 수도다.

소백산맥이 세계문학의 독자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지역성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영주를 더 영주답게 쓰는 일이다. 달녀를 보편적인 여인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달녀 한 사람의 구체적인 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이다.

가장 구체적인 한 사람이 가장 보편적인 인간에게 닿는다.

170회의 연재는 한 가지 질문을 품고 갈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는 누구의 몸 위에 세워졌는가.

왕의 몸인가.
장군의 몸인가.
정치인의 몸인가.

아니다.

대부분의 시대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릎과 손바닥과 굽은 허리 위에 올라서 있었다.

산맥도 같다.

정상만 보고 산맥이라 부르면 산을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골짜기가 있어야 봉우리가 생긴다. 낮은 곳이 있어야 높은 곳도 존재한다.

소백산맥을 읽는 일은 그 낮은 자리의 사람들에게 이름을 돌려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달녀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는 세대를 타고 흐르고, 제주로 향하고, 전쟁을 지나고, 분단을 품고, 산업화의 거센 속도를 통과해 마침내 미래 대한민국까지 나아간다.

17권은 거대한 강이다.

170회 비평은 그 강물을 열 번씩 떠보는 일이 아니다. 물속에 잠긴 돌의 모양까지 살피려는 작업이다.

어떤 돌에는 여인의 눈물이 묻어 있을 것이며, 어떤 돌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돌에는 가난했던 사람이 처음 자기 나라의 미래를 꿈꾸던 체온이 배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읽어보고 싶다.

한 사람의 작품을 세계적인 작품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쉽다.

그 작품 속에서 세계가 읽힐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어렵다.

170회가 해야 할 일은 선언이 아니라 증명이다.

소백산맥이 한국 근현대사를 어떻게 소설의 몸으로 바꾸었는지, 지역어를 어떤 방식으로 문학어로 승화시켰는지, 여성과 민중의 삶을 어떻게 역사의 중심으로 이동시켰는지, 끝내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밝힐 것이다.

 


1달을 먹은 산


1
산맥은 산이 아니라 사람의 등뼈였다
― 『소백산맥의 첫 문을 열며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봉우리만 보인다.
가까이 가면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인다.
바위와 흙 사이에 사람이 있다. 굶은 아이가 있고, 밭에서 허리를 펴지 못한 농부가 있으며, 가족을 먹이기 위해 하루를 다 써버린 여자가 있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한 시대의 밑바닥을 떠받친 사람들이 있다.

산맥은 그렇게 높아진다.

돌과 흙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 시대를 견딘 사람들의 등이 겹쳐 산맥이 된다.

이서빈의 대하소설 소백산맥1달을 먹은 산을 펼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도 높은 산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 중심에 달녀가 있다.

대하소설의 첫 문을 열면서 왕도 장군도 아닌 평범한 여성을 앞세운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은 작품 전체가 누구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볼 것인가를 선언하는 일이다.


역사는 높은 곳에서 시작하지만 소설은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


역사책은 대개 큰 사건을 먼저 기록한다.

왕조가 바뀌고, 나라가 세워지고, 전쟁이 일어나며, 권력이 이동한다.

그런데 실제 사람의 하루는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아침이 되면 밥을 먹어야 한다.

아이를 돌봐야 한다.

밭에 나가야 하고, 병든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난 날에도 누군가는 밥을 지었다.

정권이 바뀐 날에도 누군가는 장작을 팼다.

해방을 맞은 날에도 어머니는 아이의 끼니를 걱정했다.

문학은 바로 그 지점으로 들어간다.

역사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면 소설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본다.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먼저 보고, 제도가 아니라 생활을 먼저 본다.

달을 먹은 산이 달녀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큰 역사를 작은 인간의 몸으로 다시 읽겠다는 것이다.

달녀는 국가를 움직인 사람이 아니다.

전쟁을 지휘하지도 않았다.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가장 많은 사람은 달녀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

자신의 생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사람.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적은 없지만 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생활을 이어간 사람.

문학은 이런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달녀가 한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으로 읽힐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의 생에는 가난과 노동, 가족과 희생, 시대의 압력이 함께 들어 있다.

그렇다고 달녀를 곧바로 한국 여성의 상징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상징이 너무 커지면 사람은 작아질 수 있다.

달녀는 먼저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에게도 욕망이 있어야 하고, 두려움이 있어야 하며, 때로 잘못된 선택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모순을 가질 때 살아난다.

좋은 대하소설은 인물을 시대의 표지판으로 세워놓지 않는다.

시대 속에서 숨 쉬게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하루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먹을 것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다.

달녀의 시대를 이해하려면 이 감각을 먼저 가져야 한다.

오늘의 풍요 속에서 과거의 가난을 추억처럼 바라보면 안 된다.

배고픔은 사람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꾼다.

쌀이 없는 집에서 밥 한 그릇은 식사가 아니다.

생존이다.

아이에게 줄 것을 남기기 위해 어른이 덜 먹는 순간, 식탁은 가족관계의 구조를 드러낸다.

무엇을 먹었는가.

누가 먼저 먹었는가.

누가 자기 몫을 줄였는가.

이 작은 장면들 속에 경제와 계층, 성별과 가족질서가 모두 들어 있다.

소백산맥의 역사는 바로 이런 생활의 크기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힘이다.


소백산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과 시대를 잇는 기억의 척추다


제목에 들어 있는 소백산맥도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산은 사람보다 오래 산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죽는 동안에도 산은 같은 자리에 있다.

정권이 바뀌고 나라의 이름이 달라져도 산은 남는다.

그런 점에서 산맥은 시간의 저장고다.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을 지우면서 동시에 기억한다.

영주와 소백산 일대의 자연은 작품에서 단순한 풍경으로 머물 수 없다.

인물들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이다.

산이 가까우면 이동의 방식이 달라진다.

겨울의 의미가 달라지고, 농사의 조건이 달라진다.

사람들의 말과 음식, 생활습관도 달라진다.

지역은 인물 밖에 놓여 있지 않다.

인물 안으로 들어간다.

이 점에서 소백산맥은 지역문학의 가능성도 품는다.

산맥은 봉우리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높은 산과 낮은 산이 이어지고, 골짜기가 그 사이에 놓인다.

사람의 역사도 같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이어붙인다고 역사가 되지 않는다.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아낸 수많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농부.

장사꾼.

어머니.

아이.

병든 사람.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

돌아왔지만 이전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사람.

이들의 생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한 시대의 산맥이 만들어진다.

대하소설의 힘도 같은 곳에서 나온다.

인물이 많다고 대하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삶과 연결되고, 가족사가 지역사로 넓어지며, 지역사가 국가의 역사와 맞물릴 때 대하소설의 구조가 생긴다.

1권은 그 첫 연결을 시작한다.


달과 방언과 여성의 삶, 시인의 언어가 역사의 속살을 비춘다


이서빈은 시인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이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달을 먹은 산이라는 제목부터 시적이다.

산이 달을 먹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문학적으로는 가능하다.

산 뒤로 달이 사라질 때 시인은 그것을 삼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한 문장에 풍경과 감정이 함께 들어온다.

달은 빛이고 희망일 수 있다.

여성적 생명성의 이미지로도 읽힐 수 있다.

달녀라는 이름과도 은밀하게 이어진다.

산이 달을 삼킨다는 것은 시대가 한 사람의 빛을 삼키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복층적 이미지는 이서빈 문체의 장점이 될 수 있다.

다만 동시에 경계할 것도 있다.

시적 문장이 지나치게 앞서면 장편서사의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시는 한순간에 머물 수 있다.

소설은 움직여야 한다.

인물이 선택하고 사건이 이어져야 한다.

이 균형은 앞으로 17권을 읽어가며 계속 살펴야 할 중요한 비평 지점이다.

1권에서 지역어와 방언 역시 중요하다.

방언은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다.

사람의 지문과 같다.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어떤 세대에 속하는가.

어떤 계층에서 살아왔는가.

말투 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인물이 모두 같은 표준어를 쓰면 지역의 체온이 사라진다.

영주와 소백산이라는 공간을 살아 있는 문학적 장소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방언은 지역의 기억창고다.

어떤 단어 하나가 사라지면 그 말과 함께 사용되던 생활방식도 흐려질 수 있다.

이서빈이 방언을 통해 지역의 언어를 문학의 중앙으로 끌어올리는 지점은 소백산맥의 개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다만 지나친 방언은 다른 지역 독자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지역성과 보편성 사이의 균형 역시 작품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달녀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역사책에는 이런 여성들의 이름이 거의 없는가.

가족을 먹였다.

아이를 길렀다.

농사와 집안일을 함께 했다.

병든 가족을 돌봤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생활을 이어갔다.

이 일이 역사 바깥의 일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낮은 기초였다.

여성이 역사의 뒤편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 기록이 그들을 뒤편에 놓았던 것이다.

달을 먹은 산이 달녀를 전면에 세운 의미도 여기에서 더 커진다.

문학은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에게 이름과 생을 돌려줄 수 있다.

달녀는 바로 그 첫 번째 호명이다.


비평의 질문을 지나 세계문학으로, 첫 봉우리는 낮은 자리에서 솟는다


소백산맥170회에 걸쳐 읽는 작업이 단순한 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좋은 작품일수록 큰 질문을 견뎌야 한다.

 

달녀는 충분히 한 인간으로 살아 있는가.

 

가난이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소비되지는 않는가.

 

역사적 사건과 개인사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는가.

 

방언은 인물을 살리는가, 독자의 접근을 막는가.

 

여성의 희생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가.

 

비평이 작품을 높이는 방식은 무조건 칭찬하는 데 있지 않다.

 

작품이 가장 빛나는 자리와 가장 흔들리는 자리를 함께 보여주는 데 있다.

 

소백산맥이 세계의 독자와 만나려 한다면 지역성을 지울 필요가 없다.

 

더 깊게 파야 한다.

 

영주는 영주다워야 한다.

 

달녀는 달녀다워야 한다.

 

찔레순은 찔레순이어야 한다.

 

세계문학은 모든 나라에서 통할 수 있도록 지역의 냄새를 없앤 문학이 아니다.

 

한 지역의 구체적인 삶을 너무 깊게 써서 다른 나라의 독자도 자기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문학이다.

 

한 여인의 고통이 충분히 구체적일 때 다른 문화의 독자도 자기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다.

 

한 지역의 가난이 정밀하게 그려질 때 다른 나라의 독자도 자기 역사 속 결핍을 떠올릴 수 있다.

 

보편성은 추상에서 생기지 않는다.

 

구체성의 끝에서 생긴다.

 

이것이소백산맥이 세계문학을 향해 가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할 힘이다.

 

대하소설 17권의 첫 권.

 

그 첫 회에서 아직 작품 전체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170개의 는선을 지나야 한다.

 

다만 작품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는 분명하다.

 

높은 곳은 아니다.

 

가장 낮은 생활의 자리다.

 

부엌.

 

밭고랑.

 

산골마을.

 

가난한 집의 밥상.

 

이름 없이 살아간 여성의 몸.

 

이곳에서 대하소설의 첫 물줄기가 시작된다.

 

역사의 중심에서 시작하지 않고 역사를 떠받친 사람에게서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달녀는 거대한 영웅이 아니다.

 

그에게는 권력도 없고 명예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산맥의 첫 등뼈가 된다.

 

한 시대를 버텼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을 크게 남기지 못해도 다음 사람의 생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산맥은 산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산 아래에서 태어나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끝내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의 생이 서로 이어질때 비로서 역사라는 산맥이 생긴다.

 

 

소백산맥의 첫 문은 그래서 산 정상에서 열리지 않는다.

 

달녀라는 한 사람의 낮은 자리에서 열린다.

 

그 낮은 자리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소백산맥은 지도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로 보인다.

 

산맥은 산이 아니라 사람의 등뼈였다.

 

<12회로 계속>

 

권대현 (youngju@newsn.com)

  • 등록된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댓글5

스팸방지코드
0/500
  • 이 옥
    2026- 09- 20 삭제

    남과 다른 평론을 하셔서 존경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대하소설 소백산맥을 170회로 연재하신다고 하시니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 시를 어떻게 하면 잘 쓸까 싶어 시소설인 소백산맥 17권을 몇 번째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최고의 평론을 보며 많이 배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합니다. 감사드립니다

  • 청연 김상희
    2026- 09- 17 삭제

    시인이시며 문학평론가이신 청람 김왕식님의 시와 평론은 매우 깊고 넓고 또 섬세합니다 특히 <소백산맥>의 평론을 연재하심을 축하드립니다 평론속에 시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운의 향기가 오래 머뭅니다 덕분에 초가을 사색의 오솔길도 걷고 있습니다 다음 평론은 버선발로 달려가서 만나겠습니다 깊은 감사드립니다_()_ 오늘 만난 평론은 저 자신이 <소백산맥> 의 주인공들을 깊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역시! 평론의 대가이십니다

  • 청연
    2026- 09- 17 삭제

    위의 댓글에서 <태백산맥>을 <소백산맥>으로 정정합니다. 송구하옵니다. _()_

  • 청연
    2026- 09- 17 삭제

    위의 댓글에서 <태백산맥>을 <소백사맥>으로 정정합니다. 송구하옵니다. _()_

  • 청연
    2026- 09- 17 삭제

    아! <태백산핵> 이 궁굼해지게 하는 명비평! 초가을의 신새벽에 만난 감동이 제 영혼의 벽을 타고 오릅니다. 기대감으로 설렘을 가집니다. 특히 달녀가 궁굼해집니다. 제 법명이 < 청정월> 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과 존경드립니다.